내일이면 이 글을, 지울지도 모르겠다.
그래도 오늘은, 이 글을 쓰고 싶다.
스물다섯살,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.
진짜 내 편은, 내가 되어 줘야 하는데, 나는 왜 그 때 내 편이 아니었을까?
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보고, 나의 이야기를 아시는 목사님이 내 생각이 났다고 하셨다.
나와 같은 누군가, 지금도 어디엔가 있겠지.
아니? 어쩌면 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, 그 때의 내가 아닐까?
그 생각만으로, 나는 이민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.
우리의 어려움, 그 종류만 다를 뿐, 그 무게는 같다.
아직도 내 안엔, 스물다섯의 어린 내가 있다.
그저 열심히, 묵묵히, 열다섯 어린 나이에 영어도 잘 못 하고 한국인도 적은 펜실베니아의 시골에서, 중산층집 외동딸로 이민자의 삶을 살아왔다.
Merit 장학금만 바라보고 공부했었고, 부모님과 함께 일 하면서, 그 흔한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. 사랑? 사치라고 여겼다.
미국에서 E2 동반비자로 살다가 21살은 왔고, 나는 유학생 비자로 status를 바꿔야만 했다.
부모님은 영주권자가 되어도, 나는 내가 알아서 비자를 해결해야 했다.
그렇게 살아오다가 그 유명한 리먼사태가 터졌고, finance 전공이던 나에게 accounting 전공의 미국인 친구들이
Bloomberg 터미널을 보고 있는 나에게 “Good Luck”이라고 말하고 문을 닫고 갔다.
그렇게 나는, 비자를 해결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.
“야, 성폭행 당한 사람도 살아. 그것도 아닌데 너도 유난이다.”
최근 “김창옥”님의 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.
이 분은 해병대를 나온 “남자”이다.
한 영상에서 이 분은, 버스에서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뱀처럼 만지고, 뱀처럼 스르르 그 버스에서 내렸다는 것을 밝혔다.
해병대를 나온 남자도, 버스에서 남자의 뱀같은 손길에 잊혀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그 사실만으로
나는 깊은 위로와 공감을 느꼈다.
그 영상의 존재 자체가 너무 고마웠다.
나는, 너무 어렸다.
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,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.
김창옥님처럼, 놀라면 소리를 지르는 스타일이 아니고. 오히려 얼어붙어버리는 내 성향.
그 생각 뿐이었다.
나는 “증거”가 없네..
나는 “증거”가 없네…
그렇게 나에게는 공황장애가 찾아왔다.
밥은 모래알처럼 느껴졌고, 어느 날은 숨을 쉴 수가 없다는 그 공포가 찾아왔다.
아무도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.
해결 방법을 알지 못하는 나 자신조차도.
아직도 기억이 난다.
“입 조심 해. 알려지면 그 사람 인생 끝나.”
나는 그 때 생각했다.
“그럼 저는요? 제 인생은요? 사랑도 결혼도 안해 본 제 인생은요?”
그 전엔 그저,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다.
우리 엄마, 좋은 사람인데, 90년대에 한국에서 사업을 어느 정도 규모 있게 하는 사람이어서,
노동청에 말도 안돼는 이유로 몇 번씩 불려다니면서 자신을 보호해야 했던 엄마가 기억에 남았었다.
나에게 우리 엄마는 너무 멋있는 존재였지만, 그 동시에 여자로써 불쌍해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.
그래서 막연히 한국에서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.
그래서였을까? 엄마의 일이라 직접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었을까?
열다섯에 미국에 온 나에게, 영어는 너무 높은 장벽이었다. 그래서 쉽게 포기했었다.
문과 테크트리에서 가장 높은 직업. 미국에서 “변호사”가 되겠다는 목표, 잠시 잊고 살았었다.
그런데 막상 내 억울함을 풀 수 없었을 때, 그 때 생각이 났다.
난, 꼭 변호사가 되어야 되겠다.
내가 나를 도울 수 있게, 그리고 나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,
이민 변호사가 되어야겠다.
그게 내가 살 유일한 방법이겠다.
다른 목표 없었다.
돈 많이 버는 법 분야? 그런 목표 없었다.
혼자 독학으로 어떻게 하면 부모님에게 손 벌리지 않고 로스쿨을 갈 수 있는지,
어떻게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지 파고 또 팠다.
결국 나는 장학금으로 로스쿨을 졸업하고, 이민법으로만 인턴쉽을 하고,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이민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.
사실은 아직도 울지 않고 이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.
영상은, 도저히 만들 자신이 없다.
그래서 이렇게 글로 남길 수 밖에 없다.
“유영씨, 상위 1프로 아닌가요??”
“변호사라 돈 잘 버실테니까~”
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,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.
그래도 나는, 결국에는 희극을 써 보려고 한다.
나와 같은 당신들을 도우면서, 내 삶의 의미와 재미를, 당신들을 도우면서.
“돈만 밝히는 변호사”가 아니라, 나에게 의미를 주는 분야의 일로 하루 하루 먹고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.
그리고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이 나와 함께 먹고 살 수 있도록,
내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는 것 또한 너무나 감사하다.
나는 아직도, 당신들과 같을지도 모르겠다.
스물한살, 부모님의 “동반자녀”비자에서 벗어나
내 스스로 비자를 해결하고, 내 스스로 장학금을 받고,
내 스스로 취업영주권 스폰서를 찾고, 내 스스로 영주권을 받고,
내 스스로 사무실을 차리고, 운영하고..
당신들 처럼, “영혼”을 잃지 않으려, 나만의 길을 찾아 혼자서 걸어가고 있다.
이미 길을 다 와버려서, 아쉬울게 더는 없어서,
당신들처럼 아직도 헤매이는 영혼들을,
당신들에게 받은 돈을 밤마다 룸싸롱, 다른 사업에 태우며 당신들을 혼란시키고 착취하는 그 누군가가 아니라,
함께 동행 할 수 있기에, 그저 아주 조금 먼저 목적지에 도달한 내가
당신들에게 공감하며 방향을 제시 해 줄 수 있다고 난 믿는다.
최악을 지나온 나이기에, 나 또한 너무나 힘들고 아파봤기에,
예전 목사님 말 대로 “wounded healer(상처받은 치료자)”로써 미국에서 이민 변호사로써 내 삶의 미션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.
이렇게 당신들을 도우면서, 재미와 의미를 찾아 먹고 살다 보면,
나도 언젠가는, 울지 않고 담담하게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?
이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일 수 있는 것에, 10년이 넘게 걸렸다.
어차피 내 이야기를 해 보았자,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다.
그렇지만 오늘은 다르다.
내 이야기 자체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,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면
그것이 무언가를 달라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?
인생은 영화가 아니라, 나는 문동은도 금자씨도 될 수 없지만,
영화보다 영화같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었다.
그래, 세상은 아름답지만은 않다.
그래도 나는, 내 존재 자체로 당신들의 희망이 되고 싶다.
이것이 내가 이민 변호사로써 살아가는 이유이다.